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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란한 일이라면 꼭 하나 그것이었다. 부상은 중태가 아니었으나 그 종류가 죄다 칼상들이어서, 겉으로 흐른 피가 옷을 망쳐 놓고 말았으므로. 도포는 몇 갈래로 죽죽 찢어진데다 온통 갈색으로 얼룩져서 어찌해도 회생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옥사 면으로 지어 때깔 고우며 흘러내리는 선도 썩 예뻤던 것을. 혜는 팔에 둘둘 말아들고 있던 천뭉치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은 돌아가서 지어 놓은 여름옷을 갈아입고. 이건, 근무 중 입은 손해이니 나중에 직장에다 청구할까.

 

  "그렇게 해 버리지. 무엇 고민할 거 있나."

 

  궐에서 일단 임시방편으로 걸칠거리는 빌린 참이었다. 본래 도포에다 같이 매달던 것이라 갈 곳 없어진 붉은 술 노리개를 한손에 쭐래쭐래 들고서 혜는 걸음을 재촉했다.

 

 

-

 

 

  "서각주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만."

  "담연, 혜입니다."

  "출타중이십니다."

  "...그거 진짜입니까?"

 

  미심쩍은 눈으로 제자리에서 끔뻑이고 있는 혜를 마주하고, 한주화각의 전인은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부러 방문객을 피하는 중인가 싶어 장도와 함께 매달아둔 화객의 패와, 이어서는 결국 양도받았던 각주의 증표까지 보였으나 상대는 제가 아는 것이 정말 이뿐인데 어찌하느냐는 태도로 더 말하는 것이 없었다. 종내에는 증표를 가지고 지위를 대리할 정도의 분이 어째서 애먼 저에게 각주의 행방을 물으시느냐 하는 의아한 반응마저 돌아왔으니 혜로서는 달리 할 수 있는 것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저도 그것이 답답하단 말입니다?

 

  그러나 더 나올 것 없는 사람을 붙잡고 서로 말이나 소모하고 있는 것이 그의 성정은 아니었으므로. 예, 하면 수고하십시오, 꾸벅거리고 혜는 돌아서서 문을 나왔다. 화각의 건물을 당당히 드러내든 객잔이나 찻집을 위장하여 썩 비밀스레 운영하든 그것은 각 지부와 지점들에 따라 다른 취향이었다. 그러나 제국 수도 홍화에 있는 지부만은 그 세와 명성을 자랑하는 듯 당당한 사 층 누각으로, 대로의 사거리 모퉁이에 자리잡고 한(閑)의 깃발을 걸어 두고 있었다. 혜의 거처는 바로 그 뒤로 붙은 작은 건물에 딸렸다. 어딘가 허탕을 맞은 듯한 기분을 여실히 느끼며, 혜는 그다지 필요없을 것 같아 두고 왔던 잡다한 물건들-이중 바닥의 붓통이나 불에 비추어야 드러나는 글씨의 먹이나-을 챙기러 발을 옮겼다.

  안뜰의 산수유나무가 지난밤 비를 머금고 더욱 푸르러졌다. 날이 갈수록 초목은 그 짙음을 더하는데. 바깥으로 산들거리는 그것들에 시선을 주다가 혜는 허리에 손을 짚고, 하아, 혼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탁상에 늘어놓기 시작하자 생각보다도 챙기는 물건들의 양이 많았다. 직업 정보원인 화객으로 살며 여러 권모술수 겪어 보지 않은 것 아니었고 그런 것들을 간파하기 위한 온갖 기이한 물건이나 장치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 잔뜩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필요한 일을 할 때면 언제고 지령은 확실했고 그가 추구해야 할 바가 명확했었다. 비록 그 상세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해야 하는 때가 적잖았다고 하나 말이다. 화각은 결국 누군가의 것인지는 몰라도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개개의 말의 역할은 확실했다.

 

  "암중모색은 지략가의 일 아닙니까? 예? 각주님. 저는 거기에는 영 소질이......."

 

  허공에 대고 툴툴거려 보아도 설명 돌아올 리 만무. 그러니까 그는 궁중에서 일어난 그 의문스러운 일들보다 저의 할 일이 도무지 명확하지 않은 이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사실상 어젯밤 늦게까지 잠을 설치게 한 고민도 그쪽이었고. 보따리를 싸면서 구시렁거리다가 혜는 저 혼자 다시 결론을 내린다. 대리라고만 안 했는가요. 하면 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아이고 나는 모르겠습니다. 각주님 대리로 가 있었더니 그저 이러이러했습니다 하고 보고하지요. 특이할 것이 필요했다면 미리 말씀하실 것이지 제가 더 찾아야 할 게 뭐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할 각주님이 지금 안 계신다 이것이었으니. 하긴 바쁜 일이 있었으니 자리를 맡긴 거려나. 미심쩍은 구석 안고서 내내 밤을 새기 뭣하고, 시간도 남는 것이렸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의자만 채우고 있으라고만 한 것도 아니오 두루뭉술하게 당신 대신 대표로 가라 했으니, 그 대표의 자리에서 할 만한 일은 하는 것이 안 옳겠습니까?

 

  얼핏 투정이나 억지처럼 들리는 말이기도 했으나 한번씩 그 문장이 자의적일 때가 있는 각주의 명을 해석하는 데, 열여덞 처음 만난 그때부터 그는 퍽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궁금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인 내막을 조금은 캐 보겠다 결심하고 혜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여름, 풀빛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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