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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 희뿌연 구름이 여름 하늘을 가리는가 싶더니 기어코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툭, 투둑. 파란 잎이 이제 막 무성해지는 창밖의 산수유 나무에 때늦은 이슬처럼 맺히더니 곧 쏟아부은 물처럼 가득 적셨다. 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틀에 팔을 괴었다. 별달리 크거나 넓지도 않고, 살림도 단출한 그의 거처에서 이 둥근 유리창은 그가 고집한 딱 하나의 사치라 할 만했다. 언제고 풍경 내다보는 것을 썩 좋아하는 혜에게 시야를 가리지 않는 유리창은 꽤나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쏴아아. 가느다란 빗줄기들이 어느새 무명의 날실처럼 무수해져 창밖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하고 있었다. 비, 오면 길이 미끄러울 텐데. 보통의 사람들보다도 높은 곳에서 걸어 옷자락이 바닥에 젖어 끌리는 것을 걱정하는 혜는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저녁 외출이 있는 때에 적당한 날씨는 못 될 것이었다. 기세로 보아 밤새 이어질 것 같다, 생각하며 혜는 몸을 비뚜름하게 돌려 자세를 더 느긋하게 했다. 저편의 탁상에는 이번 회담에 참가하는 인사들의 이름과 가문, 간략한 정보들을 기재한 몇 장의 종이가 겹쳐놓여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글이고 며칠 전에 받았기에 이미 머릿속에는 다 들어 있는 참이었다. 기실 그는 별로 준비할 것이 없었다. 기척을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누군가의 신분과 말씨와 일과를 하나하나 외워야 하는 일도 아니었으니. 말하자면 혜의 상사인 서각주는 다만 그에게 자신의 이름과 지위를 대리하여 회담에 참석하라고만 했다. 간만의 일치고, 그리고 일이 펼쳐지는 배경치고 기이할 정도로 요구되는 것이 없었다. 다른 중요한 의중이 있었다면 따로 말을 하였을 것이고. 받은 것 또한 기초적인 정보뿐이었으니 정말로 아직까지는 추이를 살피는 것 이상의 의도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노는 인력을 굴리는 거려나.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며 혜는, 그럼에도 어쩐지 석연찮은 기분에 다 외운지도 한참 되는 종이들을 들여다보다,

 

  "에라, 모르겠다."

 

  휘적이며 두어 걸음 걸어서는 제 침상에 벌러덩 엎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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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는 그의 예상처럼 밤에도 기세를 꺾지 않고, 이따금 뇌편의 소리마저 들려오며 어둠 속에 오가는 말들을 삼켰다. 늦은 시각에 당도한다는 금월의 사절단을 맞기 위해 혜는 저녁 일찍 조정으로 향한 참이었다. 오래도록 미명이었지만 어스름히 여명이 터오고 있었다. 그가 만날 사람들도 모여들고 있었다. 한주화각 서각주 랑시휼이 수년간 사용하지 않던 연락책을 통해 전서를 띄우고서 꼭 십사 일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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