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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담았던 문파에서는 쫓겨나고, 노상에서 굶주리다 밥을 빌러 들어간 데서는 말재주가 없어 손님으로 오인당한 무전 취식. 그래서 뺨 맞고 걷어차인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데 납득만 하면 해결이 되는가, 이 처지랑 세상이 다 서럽고 억울하다. 돈이 없어도 먹었던 걸 도로 토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터덜거리며 걷는 그의 걸음은 기실 한창 굶주리기 전보다는 땅을 안전히 딛고 있었으나 마음은 어떠할까. 사정없이 올려맞은 뺨이 부어서 아직 욱신이는 것처럼 어디 한 곳이 휭하니 빈 듯 보잘것없다. 거기서 멈춰서면 아무것도 못 하고 땅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은 기분이어서, 파장에 만짐으로 돌아오는 노새보다도 느린 걸음으로 그냥 길을 가고 밤을 새었다. 부은 발 정도까지는 고행인 척하여 스스로의 처지에 연민을 주는 데 쓸만했다.

 

 그쯤하니 모양이 그야말로 완전히 거지꼴이었다. 머리끈은 진작에 한번 끊어졌던 것을 대충 매듭으로 이어 간신히 묶고 있었는데 이제는 길이가 모자랐다. 하여 도리 없이 풀어헤쳐진 머리는 원체 가벼워 뭉치지는 않았으나 어지럽게 흩어진 것이 꼭 낙엽 잔디에서 한바탕 뒹군 삽살개 같았다. 옷은 흙먼지로 지저분하니 너덜거린 지 오래요 신도 한쪽 밑창이 흔들거리는 것을 주운 새끼줄로 묶어두고 있었다. 딱 한 가지 다행이라 할 만한 점은 오늘 아침에 샘을 발견하여서 얼굴만은 말끔하게 씻은 채라는 것일까. 그러나 가득 채워 둔 물배도 낮이 훌쩍 넘어가자 소용없어져서 그는 또다시 입에 집어넣을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도대체가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왜 이다지도 게걸스럽게 먹을 것을 요구하는가. 생리 현상이 원망스러울만큼 근 일주일째 노상에서 전전하고 있는 혜의 몸은 빠르게 지쳐 갔다.

 

 그러다 길이 차차 넓어지고 눈에 띄게 평탄해진다. 어디로 이어지나 하고 고갤 들어 멀리 보니 앞은 제가 걸어온 길과 다른 두 길목이 만나는 삼거리. 그리고 아마도 그 위치를 이용해 여행객들에게 장사를 하는 듯한 주막 하나가 있었다. 그래,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야 무엇이라도 만나는 편이 낫다. 엊그제 막 밥집에서 호되게 내쫓긴 그였으나 이제는 분명히 손님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말을 잘 하여 또 하루를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으며 일단 그는 주막 가까이로 갔다. 

 

 어떻게 하나, 나뭇가지로 엮은 낮은 울타리 너머에서 손님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주인장을 훔쳐보기만 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가운데의 평상에 앉아 있던 청포靑布의 남자가 이쪽을 향해 손짓을 하지 않는가. 혜는 의아하여, 혹 다른 이를 향한 것이 아닌가 의심도 해 보았으나 청포 남자의 시선은 분명 저를 곧장 보고 있다. 웅크렸다고 하지만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사이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리 없으니 역시 눈에 띄고 만 것이겠지. 긴가민가하면서도 혜는 오라는 대로 그가 앉아 있는 평상 가까이 갔다.

 

 "너, 나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남자가 대뜸 하는 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혜는 눈을 끔뻑이다가,

 

 "예?"

 

 반문하고 멀뚱 눈을 껌뻑인다.

 

 "꼴이 엉망이라고 귀도 먹었는가, 나를 따라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보아하니 지금 몸 뉘일 곳 하나 없이 배를 곯으며 노상에서 전전하는 듯한데. 너를 거두어 옷과 잠자리를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혜는 이마를 찌푸렸다. 청포 남자의 제안은 그 내용으로는 어디 반기지 않을 만한 것이겠느냐만은, 제시하는 배경도 근거도 없고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 사람은 저를 언제 보았다고 갑자기 옷과 잠자리를 내어주겠다는 걸까? 호의라 해도 이런 식으로 베풀어지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최소한 말 몇 마디라도 나누어 보고 대강의 사정이라도 안 연후에 만들어지는 것 아니었나?

 

 그렇잖아도 문파에서 사람에게 데이고 쫓겨나서 불신과 배신감이 몸에 쌓인 차였다. 아예 맨 처음의 그였다면 조금은 순응하는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 제안을 들은 혜의 마음속에는 의심만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대인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저를 언제 보았고 안다고 그런 호의를 베푸십니까? 거리에 떨어진 과일 하나라도 주인 없는 것 없다고 했는데 저는 말씀이 반가웁기보다는 우선 수상스럽습니다. 누구신지 알고 따라가 저를 맡깁니까?"

 

 "허허, 그 어린 놈 눈빛에 의혹만이 가득하니. 눈앞에 물이 있어도 상했을 것 의심하다 기갈로 쓰러질 상이로고. 너, 찾아온 기회를 그냥 내치는 중임을 모르겠느냐?"

 

 글쎄요, 그렇게 말씀하시어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쯧쯧 혀를 차는 청포 남자의 앞에 대고 혜는 가능한 한 관심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숨길 수 없는 것이 원망스럽게도 그의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부끄러워져 괜히 다른 데를 보면서 입을 삐죽이는 혜에게 남자가 씩 웃고는 말했다.

 

 "배고프지?"

 

 "......."

 

 "마지막으로 그 뱃속에 밥을 집어넣은 건 언제이냐?"

 

 "......."

 

 대답하지 않는 혜를 두고 그는 손을 들어, 여보시오, 주인장! 소리치고는 술 한 잔을 따라 들었다. 보는 눈앞에서 한 모금을 마시고, 눈썹을 올려 으쓱해 보인다. 그리고 곧 다시 입을 열어,

 

 "거 고집불통인 놈이로다. 그러나 어쨌든 내가 너에게 밥을 먹을 길을 열어 주겠다. 내 이 주막의 주인에게 너를 급사로 쓰라고 말을 할 테니 그 일을 해 보아라. 한 달 후, 내가 다시 여기에 들를 텐데, 그때 만일 생각이 변한다면 따라도 좋겠지."

 

 뜻밖의 이야기에 혜는 벙벙해진다. 여전히 이상하리만치 그에게 친절하고 유익한 것만을 빼면 이 제안은 수긍이 되는 종류다. 저어... 말을 찾다가 결국 떠오르는 대로 물어 버린다. 왜 그렇게 저에게 친절하십니까? 청포 남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곤 거푸 잔을 채운다.

 

 "네가 거기 거지꼴로 굶고 있고 내가 주인이랑 아는 사이니 그러는 것이다. 어느 풀이 비를 떨어뜨리는 구름에 대고 친절의 이유를 묻더냐?"

 

 뜻이 그러한가. 그렇게 되는 건가? 설득 반 말 막힘 반으로 눈만 끔벅거리는 혜에게 그는 실실 웃으면서 덧붙인다. 네가 생각하는 뭔가 다른 진짜 이유, 근본적인 연유는 당연히 내가 너를 거두려고 마음먹어서 그러는 것이지만. 아직 나를 따르지도 않는 네 놈에게 그 마음 동한 내막까지 앉아 하나하나 설명해 주어야겠느냐? 그 말투는 놀리는 듯했으나 지금껏 주고받은 내용과 그러면서도 저를 내치지 않는 데에서 썩, 잠시 눈물겨울 만치 혜는 감격해 버리고 만다.

 

 "저, 감사합니다, 어르신. 베풀어주신 은혜는 제가 꼭 잊지 않고 갚겠습니다."

 

 "그 은혜를 아는 놈이 말은 이 세상 퉁명스러움이 다 없더구만. 아서라, 그 어느 일이라고 쉬이 생각하느냐. 지금 너 하는 태도로 보니 그래도 일생 내 권하는 말에는 안 따를 것 같은 것을 입만 살아선."

 

 하나도 안 믿긴다는 투로 청포의 남자는 툴툴거렸다. 사실 그 말이 맞기는 했다. 만일 제가 이대로 이 주막의 급사로 일하고 한 달 후에도 그를 따라가지 않으면 이후 언제라고 만나 은혜 갚을 일이 있을까. 그러나 혜는 진심이었다. 그 상세하고 확정된 길은 몰라도 정말로 그는 많이, 고마워서, 그러니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좀 절박해져서 혜는 어느새 주먹을 쥐고 다급히 이야기한다.

 

 "아닙니다. 정말로 할 수만 있다면 제 무엇이건, 비록 가진 것은 없습니다만, 한 사람의 몫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여 보답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 되었대두. 당장 마음 바꿔먹고 따라올 것 아니면 지금은 얌전히 가서 옷 갈아입고 밥이나 먹거라. 은인이신 이 몸은 길이 바빠 이만 가야겠으니. 휘적휘적 손까지 저어내는데 이것은 진짜로 가라는 소리다. 그, 정말로...? 머뭇거리는데 어느새 와서 남자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주막 주인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혜에게 저 옆을 가리킨다. 부엌에 가면 물동이랑 밥솥이 있으니 챙겨 먹어라.

 

 일이, 뜻하지도 않았으나, 이리 되어 가는가. 아직도 좀 얼떨떨한 채로 손을 씻고 물을 마시고 식사를 하고 나오자 아까의 청포 남자가 막 일어나서 자리를 뜨려는 참이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어르신! 다급하게 쫓아와 헉헉 숨을 몰아쉬는 혜를 또 무어냐는 듯 멀뚱히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얼굴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크게 뜨인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면서 혜는 물었다.

 

 "제가 이것만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저를 도와 주시는 대인의 성함이 무엇입니까?"

 

 "한 달 후에 제안을 받아들이면 알게 될 것을. 의심은 많은데 성격은 또 급하구나."

 

 어김없이 말은 퉁명스럽게 돌아오는데, 그러나 이것을 듣지 않고서는 안 가겠다는 각오로 버티고 선 혜에게 그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한다.

 

 "한주화각, 홍화지부의 서각주 랑시휼이다."

 

 이제는 정말로 볼일이 없다는 듯 아무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고 각주라는 그는 뒤돌아 가기 시작했다. 아. 거기다 대고 혜는 몇 번을 인사하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한낮이라, 해는 아득할 정도로 높이 떠서 멀리까지 비추고 길 위에는 아른하니 여운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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