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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내쫓겼을 때부터 짐작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 겪고 보니 이것은 진짜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는 배가 고팠다.
노자도 뭣도 없이 가기 시작한 길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나자 완전히 무리가 되었다. 처음 보따리에 들어 있던 복숭아가 뱃속으로 사라진 것은 이미 몇 시간도 더 전이다. 인적 드문 산길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강과 호수를 낀 하현의 평야였고 따라서 주변 간간이 집과 길목의 가게들 따위가 나타났다. 문제는 그가 아직까지 구걸할 말심이나 도둑질할 배짱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뭐라도 아무에게도 관련되지 않고 먹을 걸 구할 방도가 없나. 가능할 리가 없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채우면서 혜는 지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보면, 여행객들이 과일을 따먹거나 밀알을 굽거나도 하던데. 그러나 이제 막 9월에 들어섰을 뿐인 가을 초입이라 과일도 벼도 다 덜 익은 참이었다. 아직 푸릇푸릇한 논밭은 진즉에 제쳐두고서, 두리번거리며 걷던 혜는 어느 민가 울타리 너머로 가지가 자란 감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달린 열매들은 초록은 가시었으나 아직 제대로 영글려면 몇 주는 더 있어야 할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일단은 먹을 수 있는 물건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눈이 반짝거려서 그는 다가가 주위를 돌아본다. 집 뒤로 돌아가는 비탈을 타고 올라가면 손이 닿을 듯했다. 남의 집 나무지만 밖으로 비껴 나온 가지니까 괜찮지 않을까. 논리라고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으나 굶주린 그는 그쯤에서 양심을 절충시켰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서둘러 기어올라가서 바위 위로 발을 딛고 혜는 감나무 가지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 그가 처음 어림짐작했던 것처럼 몇 개의 가지들은 기울진 땅과 거의 붙을 정도로 가까워서 어렵잖게 몇 개의 열매들을 딸 수 있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덜 익은 감을 따서 도망치듯 옆의 덤불 뒤에 앉았다. 옷으로 대충 닦아서 깨문 감은 과일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떪었는데, 한창 단단한 과육에 조금 배어 있는 물기마저 반가워서 그는 자리에서 두어 개를 먹어치워 버렸다. 또 하나를 손에 들고, 나머지는 보따리에 넣어 도로 허리에 잡아매었다. 어쩐지 찜찜하니 이 근처는 벗어나고 싶어―일어나는데 머리 한구석이 잠시 아뜩하다. 휘청거리다가 겨우 바로서자 언제 그러했냐는 듯 도로 시야는 맑다. 그러나 줄곧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든, 뭐든. 찾아볼 수 있을 거야. 여전히 무계획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말을 중얼이며 다음 발을 내딛었다. 입안과 혀는 제 것이 아닌 마냥 텁텁하고 까슬하니 마른 나무 같았다.
그런 식으로, 음식이라 하기 애매한 것들을 가지고 겨우 연명하면서 혜는 계속 걸었다. 해서 마을 하나를 더 지나칠 때쯤 그는 더 버틸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체면이나 주저함과의 줄다리기에서 마음이 줄줄 끌려가고 있었다. 퀭한 눈으로 혼자 터벅거리는 소년을 두고 가끔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다 지나오다가 거리의 끝에 다다라 그는 결국 멈춰섰다. 눈앞의 밥집에서 걸어 둔 두 개의 가마솥에서 국과 밥의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멍하니 보고 있으니 이미 눈과 코는 다 먹은 것처럼 그 냄새에 취해 있다. 역시, 들어가서, 식은 밥공기라도 하나 얻어 보자. 그렇게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혜는 사립을 밀쳤다.
"아유, 저녁때가 아직 이른데. 아직 어린애 같은 젊은이가 혼자서 어디를 가남?"
오후가 기울었나 보구나. 배고픈 일이 하도 먼저라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간 감각을 주인의 말로 확인하면서 혜는 생각했다. 저편 장독대에 있다가 그를 보고서 온 밥집 주인이 넉살좋게 웃음을 띄웠다. 그에 용기를 내어, 마주보면서,
"저, 밥을......."
...아무래도 한번에 똑바로 나오지는 않았다. 제가 들어도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 같아서 혜는 크흠, 도로 말라 있는 목으로 괜히 헛기침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밥을 청하러 왔습니다만,"
듣고서 주인은 피식 웃는다.
"이 사람 이거, 혼자 여행 다녀 본 것은 처음이지요?"
"예? 말하자면 그런데."
"저기, 가서 앉으시우."
기어들어가는 그의 목소리에 주인은 마련된 상들 가운데 한 구석자리를 쓱 가리키고 성큼 몸을 돌려 간다. 어, 하며 혜가 그 뒤꼭지를 보아도 이미 가마솥으로 가까이 기울인 이는 돌아볼 여지조차 없는 것 같다. 도로 부르기도 머쓱하여 그는 얌전히 시키는 대로 상 앞에 앉아 기다렸다. 얼마 안 지나 그에게 지금 세상 무엇보다도 반가울 것이 왔다. 가득 위로 둥그렇게 퍼담은 밥공기와 국그릇, 두어 가지 종류의 밑반찬 얼마가 담긴 밥상.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그것이 제 앞에 놓이자마자 혜는 한 입 가득히, 미어터지도록 밥을 떠넣었다.
식사, 사람에게 이렇게 소중한 것이었구나. 밥그릇이 다 무얼까, 반찬 접시까지 싹싹 긁어 한 끼를 배부르게 채우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러했다. 일단 배가 차자 거의 멍했던 기분도 아득했던 총기도 돌아오는 느낌이 여실히 들었다. 끝으로 내밀어진 팥물 숭늉까지 비우고 혜는 한결 밝아진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척을 알고는 어슬렁어슬렁 이쪽으로 오는 주인에게 그는 허리를 굽혀 꾸벅 반절을 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씨로 주린 배를 채우게 되니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거 웃기는 도련님일세? 어느 누가 밥집에서 식사하고 그리 거창하게 인사를 한담? 그것 몇 푼 한다고, 나긋나긋 말을 발라도 깎아줄 것 없으요."
"예?"
"계산이나 하시우."
눈앞에 손이 내밀어진다. 그제서야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무엇을 어쩔까. 속으로 어, 어, 하면서 당황을 더해 가기만 하다가 결국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 빈손이어서. 그러니까, 밥값으로 드릴 것이 없어서."
그 뒤에 이을 말이 뭔가 필요하다는 것은, 입을 다물고 올려다보는 사람의 낯빛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으로 알 수 있었으나 갑자기 허름한 보따리가 동전으로 가득 채워지기라도 해야지. 가진 것 없는 그로서는 지금에 대해 어떤 수습도 할 수가 있는 것이 없었다.
"이게 무슨 개 죽사발 핥아먹는 소리요? 손님이 밥을 먹고는 대뜸 낼 것이 없다 하니?"
"저는, 저는 그러니까 밥을 빌러 들어온 것인데, 주인께서 그대로 너무...잘...챙겨주시어서......."
끝에 가서는 목소리가 맨 처음보다도 기어들어가, 부라리는 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머리 위에서 화난 밥집 주인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아니, 국밥 한 그릇 먹을 푼돈도 없는 거지새끼면 저 바깥에서 바가지나 들고 구걸할 것이지, 왜 멀쩡히 걸어들어와서 상을 받아 처먹고 지랄이야? 아주 미치었나. 배짱으로 사람을 부려먹어 드네? "
역시 그랬었나. 저가 너무 미적지근하게 말을 더듬어서. 그래서 오해받고 곤란한 지경이 된 것이다. 혜는 주저주저하다가 도로 위를 보았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이쪽을 향해 있는 시선에 어떻게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아서 황급히 말을 꺼낸다.
"제가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어야 했는데 그렇잖아서 미안합니다. 괜히 수고를 끼치어서 면목이―"
짜악. 말을 중간에서 끊은 것은 왼뺨으로 날아든 손바닥이다. 아주 분을 담아 사정없이 후려쳤는지 고개가 돌아가고도 한참 눈앞이 하얄 만큼 호된 따귀였다. 눈물이 찔끔 나와 감싸쥐었지만 뭐라 항의 한 마디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가 잘못한 일이고,
"당장 꺼지기나 해. 빈손이다, 갚을 것도 없다, 뻔뻔한 낯짝을 들고 말이나 주워섬기는 꼴이 하도 재수가 없으려니까."
이것은 뭐 무릎 꿇고 빌 노릇도 아니라 눈물 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가는 혜를 두고, 눈앞에서 분풀이처럼 사립문이 쾅 닫혔다. 너머로 침 뱉는 소리와 구시렁거리는 욕설이 들려왔다. 밥상 하나에 품으로 갚으라 하기도 기분이 더 더러운 일이니. 에잉, 초저녁부터 웃기지도 않는 꼴이나 본다. 내쳐지고서 그러고 있으니 왈칵 서러워져서 혜는 바깥에서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아. 이대로 떠나도 되나. 그냥 이런 식인 건가. 저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다 뭔지 모르겠는 그 기분이 죄다 싫었다. 지쳤다.
거지새끼야, 얼른 안 가! 운수 잡치게 남의 가게 앞에서 계속 서성거리면 빗자루로 패서 쫓아낼 줄 알아라! 담 너머로 아직 있는 그를 보았는지 신경질적인 큰소리가 또 들려왔다. 윽, 이를 악물고 혜는 앞으로 달음질쳤다. 도망치듯 거기를 벗어나서 뉘엿뉘엿 해 져 차가워지는 길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