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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나고 보따리를 펼쳐 가진 것을 정리하여 보니 입던 여벌옷 바지저고리와 거기 꽂아뒀던 수저 한 벌, 그리고 엉뚱하게도 들어 있는 빨간 복숭아 세 개가 다였다. 산문 초입에 주저앉아 아직 가시지 않은 발등의 멍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혜는 허탈하게 웃음지었다. 그래, 이만하면 많이 버텼다.
그 문파라는 것에 들어가서, 무의 길을 추구하겠다는 초심은 일 주일이 안 되어 미심쩍은 장애물들을 만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생각과 다른 술수들이 첩첩산중이었다. 곧은 마음을 가지고 진정을 보이면 인정받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던가. 그 작은 사회 안에서도 입문의 배경과 집안의 금전과, 수련과는 하등 관계없는, 어느 사형의 계보가 있고 어느 대사형의 계보가 있다더라 하는 식의 편가르기. 갈등과 알력에 혜는 몇 달이 안 되어 의뭉스러워졌고 일 년이 지나서는 그들에게 학을 떼고 말았던 것이다.
복숭아 하나를 손에 들고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쯤에서 그를 또 한 해 더 문파에 잡아둔 것은 순전히 고집이었다. 아직 절충도 융통성도 모르고 악으로 버티는 소년의. 문파에서 그는 거의 내내 굴러온 돌 같은 존재였고 결국 그를 가장 마땅찮게 여기는 이들에게 누명을 썼다. 산문의 주요 비급을 탐내 수련동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것이 구실이었는데, 본래라면 검을 잡을 수 없도록 손목의 힘줄을 폐하고 파문하여도 될 만한 죄목이었다. 그러나 말하는 본인들조차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는지 그저 맨몸으로 쫓아냈을 뿐이니. 그저 질투로 눈밖에 나서 여기까지 이르렀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단 한 명 그와 말을 트고 지내던 사이인 사저가 밤에 몰래 넣어 준 것이리라.
그런 마당이니 이제 앞으로 무얼 어째야 하려나. 황망히 앉아서 혜는 생각했다. 해야 할 것이나 바라야 할 것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아마도 처음의 바람을 크게 배반당한 터라 그렇겠지. 환상이 깨지고 노력은 짓밟혀 던져진 열 일곱의 소년이란 참으로 볼품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몇 시간 전의 모습은 추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반박이 가능할 리도 없는데 악을 쓰고 소리지르다가 강제로 끌려 내쳐졌으니까. 그러나 이제 다, 다 없는 일이다. 이미 그의 이름은 문파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그들과의 인연도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무엇을 할까.
빨간 복숭아를 위로 던지고 받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안에 있는 것을 한입 물었다. 온통 달콤한 즙이 입안에 가득 퍼지자 문득 정신이 드는 듯하였다. 일단은 수도. 그래, 수도로 갈까. 그런 문장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세상에 태어나서 제국 도성은 한번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따지자면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그것은 그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든 것은 옷 한 벌에 수저 한 벌, 과일밖에 없는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잘 쳐 주어서 목적은 있다 해도 실질적인 정처는 여전히 없는 상태로 혜는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