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님. 저 퇴직금 받으러 왔습니다."
"오냐."
"...그리고 아버지."
"......연아."
살면서 마음이나 기억에, 신체에 생기는 그것처럼 지워지거나 말끔해지지 않고 하나의 흉터처럼 남게 되는 흔적들이 있다. 마지막 날 결국 홍화의 편에 선 그. 그래서 적대의 장으로 마주보고 만 아버지와 아들, 그 아버지의 오랜 동료인 은인과 소년에게 각각 서로의 표정이 그러할 것이다. 아버지. 11년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얼굴은 세월을 맞아 좀 더 늙어 있구나. 그리고 각주님. 맨 처음 만났을 때의 푸른 옷차림을 상기하면 이 분과도 때를 오래 같이해 왔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많이 흘러서, 전쟁의 화로 짓밟힌 고향의 땅에서 서로 다른 승패의 자리에 섰다.
죽여요, 여왕을. 이 자리에서. 당신이.
그때 그의 손에는 생전 생경한, 그리고 지금껏 잡아 본 그 어떤 것보다도 무거운, 검이 쥐어졌고
자리를 정했음에도 또 그 무게를 차마 들어낼 수가 없어서 놓치고 말았었다.
저하, 당신께서 내 뒤에. 만인과 홍화의 태제 앞에서 오열했던 그는 마지막까지 영웅도 아니었고 투사도 아니었으며 그저 한 사람의 백성을 자처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제국, 홍화는 기어코 사막의 왕국을 복속시켰다. 빛나는 금색 별들의 나라가 쇠락한다. 이 길들 속에서.
결국 네가 내린 결정이 이것이냐? 그의 아버지 훤, 샤르의 슈안은 가문을 버리고 뛰쳐나간 아들과 십여 년만에 처음 만나 그것만을 물었고. 예. 그렇습니다. 연, 샤르의 옌, 혜는 그렇게만 답했다.
일들이 끝나면 화각으로 오너라. 거기서 이야기를 나누자.
어차피 제 거처였고요. 꾸벅 인사하고 혜는 돌아섰다.
그러고서 사흘이 지난 후였다.
"제게 실망하셨습니까. 어떻습니까. 두 분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왜 저를 거기다 던져 두고는 이 모든 일을 이제서 알게 하셨습니까."
"...네가 스스로 알고 깨닫고 헤쳐나가며 선택하게 할 예정이었다. 삶의 방향이란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는 것. 본래 네가 성년이 되었을 때 샤르의 이름을 알려주고 모든 과거들을 설명하고, 그리고 너를 설득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하게도 너는 일찍 떠나갔지. 가문과 나를 저버리고 말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야기다. 누런 먼지 이는 사막에서부터 붉은 홍화의 왕궁으로, 네 조부가 은퇴하여 내려온 하현의 평원으로, 제국 안에서 금월이 오롯 바로서기를 바라며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그리고 네가 몸담은 화각의 건물 안에서까지. 마지막 전쟁 이후 이십 년간 고요하였으나 이번의 일로 마침내 다시 여명이 터오리라 짐작하였다. 여명은 시작, 그래. 시작일 뿐이므로 시간의 한 지점에서 끝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 피를 이은 후대에까지도 계속 전해져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운명을 외면했던 너를 건져다가 파도 속에 던져넣었다. 어린 새가 비행하는 것처럼 모르는 곳으로 날려보냈다. 그리하여 짧으나마 세상의 사연들을 겪어 보고, 다 둘러보고 생각한 다음에는 마지막에 기다렸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를 바랐다. 하지만 네가 택한 길이 우리의 적국이로구나."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걸어온 길과 해 왔던 선택들을 보았습니다. 각자의 신념, 각자의 목적, 두 나라를 지지한다는 이름 아래 한 점으로 겹쳤으나 또 각각 수많은 곳으로 갈라져 뻗어나갈 미래들을 보았습니다. 희비의 엇갈림, 생사의 기로. 쇠가 맞부딪치는 전장에서 누구는 피를 밖으로 얼룩지게 하고 누구는 품고 있기를 성공하는 불티 같은 찰나들. 과거조차 모르고 뛰쳐나가 당신의, 각주님. 손 안에서 착실히 머물렀던 저 연이가 두 분 바라시는 대로 찢어지고 가라앉고 도로 떠올라 짤막한 시일 동안 감당키 힘들 만큼의 담금질을 당하여 이제 여기에 섰습니다."
금월의 피와 긍지를 이은 저, 홍화의 사람으로 이십 육 년을 살고.
몰랐던 과거와 운명을 마주하니.
어디를 가리키고 무엇을 가리키는지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게 마치 광음의 속도마냥.
"저, 연이라 불리었습니다. 버리고 나온 이름조차 싫어서 그냥 이 화각의 정보원일 뿐인 연으로 불러 달라 했지요. 불로 달구어지고 정련되는 샤르의 연煉이와도 같은 소리였는데, 그러나. 제가 불린 이름은 제비의 연입니다. 버들가지의 연입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 두 분의 앞에 서 있는 연이.
누군가는 말하더이다. 세 있는 자들은 자신의 이익과 세를 불리기 위해 나라를 선택하고 세가 없는 자들은 살아가기 위해 나라를 선택한다고. 어릴 적 부모를 저버리던 마음은 그와 또 달랐지요. 나라를 선택하잖고 그저 태어난 속한 나라에 긍지와 사랑을 품어 충성으로 보국하는 비장한 이야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제가 저버리고 나온 것이 실은 곧바로 그것이었지요. 아버지와 각주님의 오랜 뜻은."
백성들에게 있어 나라는 별 것 아니며, 그들이 땅을 디디고 사는 터전이 곧 나라라.
"아무것도 모르고 저는 스스로 이 사람 홍화의 민초라 칭했습니다. 기실 저에게 나라의 의미는 없었고 다만 태어나 발 디디는 땅이었을 따름입니다. 명가의 자손이었으나 민초로 자란 저는 그래서 이 터전을 내 나라라 하였습니다."
아버지. 굳게 입을 다문 상대에게 혜는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다시 뒤로 물러난다.
"꿈꾸던 비장함은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고 이제 와 해묵은 신념을 마음 대신 불어넣어 충성 아래 설 수도 없는 일이라. 저의 길은 이렇게 뻗어나가나 봅니다. 저의 선택이 이것입니다. 제 지난날을 다 꾸리셨던 두 분에게 거스르는."
십오 년간 그를 키워내었던 부친. 팔 년간 그를 거두었던 각주. 두 사람도 무거운 표정이었으나 홍화의 자리에 선 그를 처음 마주하고 나서 삼 일간 생각이 정리되지 않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예정된 결말, 예정된 대답. 오늘 그들은 서로에 대해 이유만을 교환하고 마무리를 지으러 온 것이다.
훤, 그는 아들을 보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다. 눈빛은 희망을 말리고 애틋함을 지운다. 하여 말소리는 돌이킬 수 없이 떨어진다.
"너와 나는 부자지간이었으나 오늘부터 또한 원수다. 다른 나라의 마음과 기치 아래 서니 어찌 서로를 용납할까. 가족의 정과 세상에서 만나는 은연들이 비록 다 소중하나 일찍이 금월의 이름을 세우는 데에 일생 바치기로 마음먹은 후부터는 대의를 위해 멸친滅親하기로 하였으니. 너는 샤르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먼 곳으로 날아가겠다 하는구나. 그까지는 자식을 키워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으로 배웅하리라. 그러나 그러면서 너는 한 번 버렸던 이름을 이제 영원히 버리고 이어진 끈을 끊어낸 것이다. 추적할 필요는, 없을 테니 않겠으나 이 앞으로 다시 만난다면 겨누어지는 것은 칼이다. 홍화의 사람인 연, 네가 마주 들어야 할 것도 칼이고."
말들은 온전히 간명했다. 그래서 눈으로는 의미를 나눌 것 없이 각자 서로의 모습만을 담았다. 고요, 고요하다. 이 방은. 각주를 따라왔던 가장 첫날 발 들였던 곳이며 그 이후 언제고 지령을 듣고 때로는 잡담을 나누고 드물게 고민되는 무언가 있을 때에는 속의 이야기도 하곤 하던, 익숙한 장소였다. 매듭을 하나로 모아 자르니 여기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난다.
"잘, 알겠습니다. 하면."
혜는 바닥에 꿇어앉아 큰절을 올렸다.
"석별 고하는 자리에서 저 연, 아버지의 아들이자 각주님의 사람으로서 마지막 인사 드리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제가 참으로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다 갚을 길 없으나 이 마음만은 알아 주시기를 진정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의 일로 오해하고 있던 중한 것 하나를 바로잡으니. 구차하다 욕하고 그 존재마저 부정하였던 집안의 뜻이 세를 전해 내려오는 굳세고 꿋꿋한 충의忠義였음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두 분은 금월의, 어린 제가 바라던 참된 영웅이실 것이며. 비록 저는 떠나가 그 영광된 이름 잇지 못하나 한켠에 기억하고 있으리이다.
불초자가 떠납니다. 영영. 칼을 겨누지 않는다면 마주치지 않으리니, 두 분께서는 안녕히 계십시오."
침묵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뒤돌아서 걷는 걸음마다 공기가 찢어지고 그것은 세계를 가르는 경계가 되어 서로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떨쳐내고 나온다. 바깥에서는 바람, 바람, 바람이 불었으며 소매를 부풀리고 어느 방향으로 잡아끌어 가자는 것처럼 펄럭이었다.
긴, 이어져 내려온 이야기. 누런 사막의 먼지 이름이 붉은 꽃의 땅으로 와 마침내에는 스스로를 거스르고 종終을 고하는데, 밤은 떨어지고 새벽은 터와 이제 다르게 또 시작하는 듯싶다. 후대로 내려가면서 물길은 바뀌고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데로 자꾸자꾸 흐른다. 그리고 바로 지금 굽이치는 곳에 선 이는 그, 지금 모든 시간이 비추는 것은 그의 오늘.
새벽, 여명에 모르는 바람이 분다. 버들인 그가 가지처럼 휘니 어디로 어디로 갈까. 무애無㝵한 세상에 미래가 한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