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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영민한 사람입니다. 다만 그 말 노릇에 너무 충실하느라, 스스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게지요. 먼저 각주께서 구태여 그대를 대리로 보낸 이유가 무엇일지...는 생각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각주님이 저를 여기에 대리로 보낸 이유?

 

팔 년 전, 이름도 모르는 푸른 옷의 남자가 그를 처음 거두겠다 했을 때 품었던 의심 이후로 지금껏 단 한 번도 그가 내리는 모든 명령들에 궁금증 하나 품어 본 적 없었다. 알아야 할 일이라면 어련히 알려주겠거니. 제가 몰라야 할 것이라면 몰라야 하기에 말하지 않겠거니. 그는 땅에 자라는 풀이고 말들은 내리는 비였으므로 날이 맑거나 흐린 데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제게 당연하지 않은 일을 자꾸 요구하십니다, 만. 야타 님의 말은 자꾸만 저에게 제가 알지 못하고 생각지 않은 너머의 어딘가를 더듬고 짚어보라 하는 듯하군요."

 

마주 있는 사람의 표정을 보았으나 그 언제와도 같은 무심한 검은 눈, 끊어지거나 이지러짐 없는 호선의 입으로 웃는 표정일 뿐이다. 정보각이 아니라 세상 어디서도 실은 눈동자에서 문장을 읽어낼 수는 없는 일이리라. 잠깐 물끄러미 보다가 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에게 바라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이 입에서 나와야만 하는 어떤 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시려는 이야기는 그에 대한 실마리를 품은 우화이기라도 하겠군요."

 

듣는 것이 어렵겠습니까. 항상 하던 일이고 해야 하던 종류였지요, 남의 말을 들어 전하는 것은.

 

"야타 님의 어릴 적이라면 이 소연이 태어나기도 더 전이로군요. 그때의 야타 님은 지금과도 다르게 더 아이 같으시었나요."

혜의 질문 아닌 질문에 야타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그냥 아이같았던 정도가 아니라 거의 막무가내로 치기어린 짓을 일삼는 어린애였던 것이다.

혼자 일을 벌여놓고, 수습하고, 힘들어하고, 또 칭얼거리고.

어쩌면 칭얼거릴수나 있었던 그 때가 좋았겠다.

 

그대는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공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 어느새 본인도 모르는 체 그렇게 되도록 돌아가는 일이 빈번하다는 것을.

 

야타는 입을 떼었다.

바야흐로 대서사의 시작이다.

 

"저는 어릴 적에 홍화 황궁에서 자랐습니다. 공도 당연히 아실거라 생각하지만, 황궁이란 붉지 않은 피바람이 매일같이 몰아치는 곳이지요. 뒷배경은 물론이고 왕위 계승권은 거의 없다시피 한 저나 제 누님,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하루하루가 살얼음 같았습니다.

 

그런 일이 빈번하다는 것은 금월도 결코 모르지 않았기에, 어머니의 오라비이자 유스흐의 족장이었던 자는 그 옆에 호위무사를 딸려보냈죠. 그래도 후궁으로 가는 것이었기에 같잖은 사설 호위가 아니라, 금월의 이름난 명가 사람들을 모두 올려보냈습니다. 저도 이 사실은 금월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름이 빠지질 않던 가문이 어느 날 훅하고 사라졌길래.

 

저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습니다. 항상 어머니의 옆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요. 가끔은 이야기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하여간... ...제 어머니와 누님이 죽고나서, 그 젊은 무사는 많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더군요. 저는 그 때부터 조치를 취하고 있었기에 안전했지만서도."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 쯤에서 이야기를 쉬었다 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 조금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할 때가 왔다.

 

"그 후로 그 무사의 가문과는 영영 연이 없는 줄로만 알았건만. 얼마 전에서야 다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젊은 무사의 아들이라는 자였습니다. 본가는 홍화에 두고 있으나 아직도 금월의 독립을 바라는 무리들과 계획을 하고 있다는, 그런 간단한 이야기였습니다만. 가문 이름도 그때가 되어서야 제대로 들었습니다."

 

혜, 그대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겠지요.

 

"샤르, 라고. 금월에 뿌리를 두었었으나 홍화에 거처를 가진."

 

야타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눈을 들어 혜의 표정을 확인했다.

머리가 돌아가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대 주변에 뜬 의문표에 제 보이지도 않는 눈이 다 어지럽군요.

 

"그 때 같이 연락을 해 온 사람이 있었는데,"

 

하나, 둘.

 

"한주화각 홍화지부 서각주라고 소개했던가. ...이렇게 또 역사가 시작되는 게지요..."

 

그의 말꼬리는 서막으로 위장하고 흘러나왔으나,

사실 그것은 종을 고하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로.

 

다시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

 

세상에 영원한 적이 없고 영원한 동지가 없습니다. 훤 공.

그대들에게 대신 전해드릴 이유 쯤이야 사백 오십 개 정도 준비해놨지요.

공께는 내보낸 아들이 먼저일지 모르겠으나, 저는 제 평안이 우선으로.

 

그러게 자식교육은 직접 시키셔야지요...보세요.

자식이 아닌 자도 키워 제 뜻대로 잘 만들어 놓잖습니까...

 

그의 시선이 벽 몇 개나 너머에 있을 왕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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