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 미궁을 빠져나와 바라본 불길은 얼굴을 비추는 노란 빛깔도 코를 서서히 익숙하게 하는 탄내도 멀리서 아우성치는 소음들도 다 낯설었다. 수십 년 전에는 그의 고향인 하현에 속했다는 너른 금월의 평원은 흐린 하늘 아래 우수수 스치는 알아들을 수 없는 풀 소리였다. 모르는 타국의 왕궁으로 향하기 전까지의 밤에 혜는 아주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며칠 전들에 대해 생각했다.
―연아.
예, 뭐 한동안 저 한가했지요? 얼마나 걸리는 일입니까? 초여름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잖습니까. 얼른 끝내고 악기나 뜯을 수 있거나, 아니면 높으신 신분이어서 구실을 만들어 뱃놀이나 할 수 있는 거였으면 하는데요, 각주님.
―거 안된 일이로구나. 초여름은 다 지날지도 모르겠다만 높으신 분들을 만나는 일이기는 하다. 선상 연회라도 있으면 배는 얻어 타겠지?
무엇입니까?
―이번에 금월의 사신들이 홍화로 온다. 이십 년 전의 전쟁 이후로 오랫동안 조용했지. 황제국인 홍화와 그 속국이 될까 그렇잖을까를 정하는 금월의 회담이다. 두 나라의 주요 인사들이 각각 사절단과 대표단으로 모이는 모양인데, 거기 나를 대신하여 가거라.
......저, 가장에 능하다지만 각주님의 풍채를 따라갈 자신은 없는데요?
―가장이 아니라 그냥 대리다, 이 놈아. 가서 화각 서각주님의 대리라고 해. 네 이름은 그대로 담연 혜이고 모습도 꾸밀 것 없어. 필요한 준비들은 청아靑兒 편에 보내겠다.
그 작은 애가 가져온 것은 두루마리 하나에 종이 두어 장이었고 사절단과 대표단으로 온 사람들의 가장 기초적인 정보밖에는 없었다. 반나절이 안 되어 혜는 그것을 전부 머릿속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고 다가오는 회담의 날까지는 이틀이 비어서, 칭얼댔던 것처럼 초여름에 비파나 뜯으면서 보냈다. 미명의 밤에는 비가 왔고 그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옥색 도포에 붉은 신을 신은 채 휘적휘적 황궁으로 향했다.
그때는 미처 이 무게를 모르고.
곧 다음날 밤부터 아득히 덮쳐온 중독되는 향, 이어지는 것은 팔자에도 없는 암중모색. 군사가 모인다 하여 헐레벌떡 쫓아갔고 모래가 덮쳐오는 미궁, 낯선 땅에서는 전란. 그리고 발이 묶인 채 제 비파가 놓인 집이 무사하지 못하겠다 듣는다. 세상이 덮쳐오는 속도가 정신을 잃을 만치 빠르다. 가만히 붙박여 있는데 말과 사건과 사람들이 휙휙 지나쳐서 눈 맞출 곳을 쓸어가는 천구天球의 파도가 된다. 휩쓸리지는, 않으려고, 뛰어 보기 시작했다.
해서 정신을 차리니 피가 난무하는 전장에 있었다. 화약 냄새 매캐하고 타오르는 연기 시야를 가리는데 두 눈을 치뜨고 적, 적대해야 하는 사람, 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일전에는 무를 배워 강해지기로 했었지. 그래서 기개와 긍지 있는 사람이 되려 했었지. 단기필마에 칼 한 자루 차고 무용담을 쓰려는 꿈도 더 어릴 때는 꿨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치는 칼날을 미끄러뜨리고.
두 뼘이 못 되는 작은 장도粧刀를, 손톱이 살을 파고들만치 꽉 쥔 채 모자란 힘으로 겨우 받아낸다. 이 유약한 자가 창병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어찌 살아남았는지 천운이다.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뛰어온지라 피를 뒤집어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그리고 여벌을 챙기지도 못하여 검은 갈색 얼룩들과 찢어진 소매 몰골 그대로, 여왕 고요의 숙청으로서 전쟁이 끝난 금월의 땅에 그는 앉아 있었다.
어떤, 낯선 땅 위에 서 있는지
어떤, 낯선 전란에서 칼을 겨누었는지
어떤, 낯선 운명 속에 내가 있는지.
고개 들어 올려다보면 사막의 하늘에 금빛 별들이 창창했다. 그것들은 저들의 모양을 가지고 여전히 있었다. 아래에 사람만이 마치 길을 잃은 것처럼 헛헛하니 드나드는 바람 더운 밤임에도 몸 속으로 서늣하게 시렸다.
그러나 멀고 멀고 광활한 세상이다. 누렇게 피어나서 멈추지 않는 먼지처럼 일어나는 일들에 달리어서 그는 또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의, 다시 다음날 여명이 밝아 오기 전까지의, 하루 밤이었다.